세상교회
worldly church

[주석읽기의 즐거움] 막간: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by Hyun Kim, on September 24, 2026

여기서 정주행하면 아프신 하나님, 고통받으시는 하나님, 우는 하나님, 함께 우시는 하나님, 함께 고통받으시는 하나님, 고통의 연대, 언약의 연대(covenant solidarity – 제미나이의 표현) 라는 여기서, 아니 성경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로 넘어 가겠지만, 잠깐만 후진기어를 넣고–왜냐하면 주석 읽기의 즐거움은 익숙한 텍스트가 어느 순간 지금껏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옷을 입고 내 눈앞에 희미하게, 다음에는 점차 더 또렷하게 나타나는 순간의 환희인데, 이걸 즐기려면 참고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 집착하고 천착해야 한다. 예레미야의 질문으로 돌아가서–모든 질문에는 답이, 아니 답의 형식, 답의 내용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이것이 제미나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꼼꼼히 읽어 보자면,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하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렘12:1–2)

도대체 예레미야는 무슨 생각으로…–어떤 종류의 답을 기대했던 것일까?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나이까” 다른 말로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악은 왜 존재하는가? 예레미야서의 매력은 아시리아 치하에서 살았지만, 아직 바빌론이나 페르시아의 영향(신학에서 아주 큰 주제이다), 나아가 그리스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히브리 전통(의 막바지)에 있다는 것이다. 나중이라면 아마 달라지겠지만, 심지어는 지금이라도 이 질문에 하나님이 “완벽하신(선하신) 내가 불완전한(악한) 세상을 만들거나 용인한 이유는 혹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수학적으로 말해서…” 같은 대답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대하는 대답의 프레임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잠시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신약시대로 오면, 약 300년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몰락시키고 그리스의 시대를 열었는데, 당연히 정복자 그리스 사람들은 정복한 세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그리스 디아스포라라 하는데, 히브리 디아스포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정복자가 정복한 땅에 퍼져나가는 것과 피정복자가 강제/반강제로 정복자의 땅에 퍼져나가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예수의 시대는 그리스의 영향이 길거리 구석구석에서 보이기 시작했던 때였다. 예를 들자면, 길에 날때부터 맹인이 있는데,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9:2)

아주 많은 신학자들이 이 귀절 때문에 당황했다. 날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도대체 태중에서 무슨 죄를 지었? 아니면, 그 전에?

믿거나말거나 피타고라스나 심지어는 플라톤도 윤회나 영혼이 여기저기 몸 사이로 옮겨 다니는 것을 믿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16:13–14)

이런 귀절에서 피타고라스의 흔적을 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빙의… 길거리 플라톤주의, 방구석 피타고라스주의인 것이다. 다른 말로 헬레니즘이라고 한다. 도대체 태중에서 무슨 죄를 지을 수 있을까? 어거스틴왈,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Tractate 44)),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아니면 다른 생에서, 철학자들의 망상처럼, 죄를 지었는가? 이런 바보같은 소리를 믿는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는 없기를! 존재하기도 전에 어떻게 죄를 짓겠는가?

이 분이 자그마치 원죄론의 아버지이다. 복음주의/정통주의의 아버지 칼빈의 말을 들어 보면 (요한복음 주해),

제자들은 일상적인 오류에 빠졌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이 사람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맹인인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가? …

유대인들은 피타고라스의 발명품인 영혼의 환생/윤회(μετεμψύχωσις)의 개념을 이웃 그리스인에게서 배웠음에 틀림없다. 영혼은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옮아 간다는 것이다… 이런 괴이한 소설에 오염된 제자들은 이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다른 육체에 깃들어 있었고, 그때 지은 죄로 지금 처벌을 받는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예수 시대, 헬레니즘 시대 방구석 피타고라스주의자, 키보드워리어 인과주의/과학주의자들이다. 예수는 어떻게 하는가?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9:6–7)

피타고라스의 오류에 대해서 따지거나 논증하시지 않고, 에헴,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다른 데서는 말씀만으로 고치시는 예수님이 여기서만 굳이 몸을 숙여 침을 뱉고 진흙을 이기는게 누군가는 일종의 의식, 그러니까 길거리 마술사처럼 보이는/보이게 하는 것이라지만, 또 누군가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재현이라 하기도 하지만, 제미나이 왈 뭔가 나쁜 일이 생기면 방구석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서 훌쩍거리는게 사람의 본성이라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평소에 교회도 잘 가고…” 식으로 또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런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일까?” 라는 철학적 사변으로 후퇴하는데 이것도 자기연민의 한 형태이다. 피타고라스는 가장 높은 경지는 이론 θεωρία 그러니까 명상이라 했고, 철학자가 하는 일이 가장 고귀한 일이라 했지만, 제자들이 한 행위는 날때부터 맹인인 거지를 보고, 정확히 그 일–그러니까 이론화, 명상, 범주화해야 하는 지적 퍼즐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기연민, 문제는 있는데 어찌할 수 없으니 속수무책의 자기연민, 분석으로의 후퇴, 제미나이는 “교감이 아닌 분류(categorize rather than commune)” 라 한다. 철학도 자기연민… 예언자 전통은 다르다. 구경꾼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팔을 걷어 붙이고, 침을 뱉고, 진흙을 주무르고, 손을 더럽히면서 나서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방구석 플라톤주의자가 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제미나이왈,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는 완전히 잘못된 질문, 언어게임을 하고 있는거야. 너희는 지나온 길, 뒤쪽을 보면서 누구를 비난할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분석하는 질문을 하지만, 나는 앞을 보면서 언약의 명령, 이 파탄난 세상을 어떻게 할지 물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제미나이 나름 똑똑하다.) 덧붙이자면, 그리고 날때부터 맹인인 사람에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너도 뭘 하라는 것이다. 그냥 마술사의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은 예언자 전통에 서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당연히 길거리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심지어는 방구석 페르시아주의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그 이전이니… 우리도 눈에서 헬레니즘과 페르시아주의의 눈꺼풀을 떼어내고, 양파 까듯이 키보드워리어 플라톤주의의 껍질을 벗겨 내고 예레미야의 질문을 다시 보자. 그가 묻는 것은 철학적 사변이 아니고, 과학적 인과성의 추론도 아니다. “왜” 라는 질문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것은 따지는 것이다. 왜 이러셨어요? 뭔가 좀 하세요!

하나님의 대답은 “엄살 부리지 마” 더하기 “네가 해” 이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렘12:5)

내게 묻지 말고, 너는?

끝내는 말, “어찌하겠느냐” וְאֵיךְ תַּעֲשֶׂה 와엨 타아세, 그래서? 넌 뭘 할래? 네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