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신학] 재의 수요일, 신학의 일, 신학자의 일
by Hyun Kim, on March 08, 2025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그저 윤대통령의 석방이 로마 공화정의 마리우스의 귀환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마리우스와 술라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가. 오늘 일은 우파의 승리도, 좌파의 좌절도 아니다. 후세는 앞으로 엄청난 일을 가져올 수 있는 역사적 우연으로 기억할 것이다.
재의 수요일, 신학교에 와서 처음 들었다. 사순절 이야기는 귀동냥으로 조금씩 들었지만, 사순절의 첫날, 재의 수요일 이야기는 처음 들은 것 같다. 로마 제국에서 수백 수천이 죽었던 일에 비하면–마리우스가 귀환했을 때도, 술라가 돌아왔을 때도 수백명이 십자가형을 당했다–단 한 사람이 그렇게 죽은 것이 그리 중요했을까.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로마공화정 말기와 닮아 있다. 한국에 파시즘이 없었던 이유는 정복자의 위치에 선 제국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극우가 창궐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장중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성장하는 한은 아무리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용서가 되는 법이다. 나라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그 비난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다.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다. 제발 문명국가 답게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끝나기 바란다. 그럴 수 있을까?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정치의 문제는 누군가 엄청난 답을 찾더라도,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법이다.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노자의 도덕경 제80장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뜬금 없지만, “닭과 개의 소리”에서 굴뚝에서 밥하는 연기가 나오는 평화로운 마을이 연상된다. 노자는 좀 이상하고 모자라는 노인 느낌이 있지만–특히 앞의 “편리한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다( 使有什佰之器而不用)는 이야기, 인공지능의 시대에 받아들이기는 커녕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이야기–정치가 할 일은 정치가 있다는 것도 모르게 하는 것이다. 정치의 한계효용이 0에 수렴할 때, 즉 내가 정치에 참여하건 말건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노자가 말했듯이 누가 왕인지도 모를 때, 정치는 잘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노자의 다른 모든 점에 의문이 있더라도, 노자를 가끔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교회로서는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든 책임이 있고, 결국은 자기 뿌리가 어디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심판대에 올라 섰다. 걱정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교회의 위기라고 느끼는 이유가 지금까지 하던 방식으로는 앞으로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다. 칼 바르트는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신학 작업은 오직 저 거대한 핍박 안에서만 착수되고 실행될 수 있다” (칼 바르트 2014). 과학에서 그것은 기회일 것이고, 신학에게 이것은 은혜이다.
그는 또 신학은 “시험 안에서” 발생한다고 하며 (칼 바르트 2014), 불 가운데를 통과하고 남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교회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칼 바르트 2014). 하나님의 시험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시작하고 노력하는 일에서 떠나는 사건, 사람의 행위를 외면하고 얼굴을 감추시는 사건, 그에게 성령의 임재와 행하심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사건이라 한다 (칼 바르트 2014). 한국 교회에 이런 일이 생길 것이 두렵다면, 이제 성장과 축복의 시대는 가고,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다가왔다는 조짐일 것이다. 이런 시대가 온다면, 이제야말로 신학 작업이 필요한 시대라는 징조이다.”
자그마치 2022년에 쓴 글이다. 보고서에서(몇년 전에, 그것도 수업 보고서에 쓴 내용을 굳이 인용하는 것이 낯간지럽지만). 이제 시작이다. 나는 그것을 원하는가? 절대 원하지 않는다. 무섭다. 상상도 하기 싫다. 뜬금 없지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유독 이 구절이 생각나는 밤이다. 재의 수요일. 닭이 붉다.
읽는 책
신학
- 칼 바르트. 2014. 개신교신학 입문. Translated by 신준호. 복있는 사람.